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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리프스키 대사의 절박한 미션

전쟁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베를린의 폴란드 대사관과 제3제국에서 일하고 있던 유제프 리프스키 대사와 외교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독일의 폴란드 공격 이후, 리프스키 대사는 대사관 및 베를린 총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9월 3일 코펜하겐으로 탈출했다. 거기서 그는 절박한 한 발을 내딛기로 결정했다. 폴란드로 돌아가서 전쟁으로 혼란 중에도 유제프 벡 외교부 장관을 찾아가서 전쟁을 예고하는 베를린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들에 대해 직접 보고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가능한 모든 교통편을 동원하여 스톡홀름, 헬싱키, 탈린, 리가를 거쳐서9월 9일 빌뉴스에 이르렀다. 거기서 바란노비치, 리브네, 두브노를 거쳐서 크세미에니에츠와 쿠트에 도착해서 정부가 폴란드-루마니아 국경을 넘기 전에 외교부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는 데 성공했다. 그후 그는 바르샤바로 돌아가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전쟁 중의 리프스키 대사의 운명도 대단하고 극적으로 흘러갔다. 9월 18일 루마니아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까지 가서 폴란드 군 창설에 자원했다. 코에트퀴단 훈련 캠프에서 간부 후보생 교육을 마치고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자 그레나디에르 1번 부대 전선에서 싸웠다.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가 알자스에 있는 수용소에서 도망쳐 프랑스와 스페인을 거쳐 런던에 이르렀다. 소위로 진급하여 1940년 11월부터 1946년 9월까지 세 명의 총사령관-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카지미에시 소슨코프스키,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밑에서 외교부 정치 자문관이자 리에종 역할을 수행했다.

1943 Cairo

1943년 11월 13일 카이로에서 유제프 리프스키(우측)이 총사령관 자문관으로 1939년에 주독일폴란드대사관 무관이었던 안토니 쉬만스키 대령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 쉬만스키 대령은 후에 소련의 포로가 되었다가 폴란드군과 함께 소련을 탈출했다. 카이로에서의 둘의 대화는 1939년 9월 이후로 두 외교관이 처음으로 다시 만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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