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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루마니아∙헝가리 난민들의 상황

1939년 9월 전시 작전 중에 약 2만 명의 폴란드 시민들이 폴란드-루마니아 국경을 넘었다. 난민 상당수에게 체르니우치의 폴란드 총영사관은 기본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첫 번째 거점이 되었다. 추방 당한 정부 관료들도 이곳으로 향했다. 체르니우치 폴란드 총영사관, 부쿠레슈티 폴란드대사관처럼 루마니아의 폴란드 외교 거점의 기본적인 업무가 난민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약간의 금전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되었다. 폴란드 군에서도 3천 6백 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약 3만 명의 군인이 루마니아에 도착했다. 이들은 당국에 의해 수십 개의 난민 수용소에 나누어 수감되었다. 폴란드 정부는 난민 문제 책임자로 미로스와프 아르치셰프스키를 난민들을 보살폈던 폴란드 대사관에 파견했다.  

9월 방어전이 끝나고 10만 명에서 14만 명에 달하는 시민∙군인 집단도 헝가리에 도착했다. 지역 당국은 전반적으로 난민에게 우호적이었고 이들을 위해 105개의 수용소를 마련했다. 부다페스트의 폴란드 공화국 공사관 덕분에 억류되었던 폴란드인 대부분이 강제 체류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헝가리 정부는 억류됐던 폴란드인들의 대거 해외 이동을 조용하게 허용했다. 1939년 가을과 1940년 봄, 폴란드 공사관은 21,000명의 군인과 6,000명의 시민들의 프랑스 탈출을 성공시켰다. 루마니아와 헝가리 구조 작전은 두 국가의 폴란드 공사가1940년과 1941년 독일에 의해 강제 철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A passport issued in October 1939 at the Consulate of the Republic of Poland in Chernivtsi.

체르니우치의 폴란드 영사관이 1939년 10월 발행한 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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